전국 지방자치단체가 예산 부족을 빌미로 매년 약 706억원에 달하는 비용을 민간에 강압적으로 떠넘기는 것으로 드러났다. 공무원이 수행해야 할 ‘건축물 현장조사ㆍ검사 및 확인 업무’를 대가 없이 지역 건축사들에게 위탁하고는, 이들의 활동비를 허가대상 건축물의 설계 및 감리자가 지급하도록 한 탓이다. 현장조사ㆍ검사 업무가 2000년부터 본격 시행된 점을 감안하면 약 15년 동안 1조원에 달하는 금액을 전국 건축사 및 감리원들이 떠안은 셈인데, 지자체들은 그 동안의 관행을 빌미로 정당한 대가 지급을 거부하고 국토교통부는 이를 묵인하고 있다.
10일 건축업계에 따르면 전국 지자체들이 국가의 업무를 건축사에게 대행시키면서 정작 대가는 지급하지 않는 불법행위를 저지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행업무 건축사의 지정 방법 및 수수료 등을 건축조례에서 정하도록 했지만 법에서 정한 수수료가 조례에 반영되지 않은 탓이다.
때문에 각 지자체마다 업무 대가가 몇 천원에서 수십만원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등 기준이 통일돼 있지 않고, 그나마 대가를 지급하는 지자체도 서울시 등 몇몇 광역 지자체를 제외하면 거의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 15년간 이어진 불법 관행, 정부는 묵인
건축물 현장 조사ㆍ검사 및 확인 제도는 1962년 처음 도입됐다. 위법 건축물의 발생으로 인한 사회적 자산의 손실을 예방하고, 특히 지자체의 경우 무면허 시공자에 의해 엉망으로 진행되는 위법 건축물들을 잡아내기 위함이다.
그렇지만 현장 검사를 맡은 건축 공무원들의 비리 문제가 지속적으로 불거졌고, 조사를 담당할 공무원의 숫자가 턱없이 부족한 점을 감안해 제3의 전문가에게 업무를 위탁할 필요성이 대두됐다. 이에 따라 1980년대부터 업무 위탁 범위가 단계적으로 확대돼 1999년 현재의 틀이 잡혔다. 건축물 설계 및 시공과 관련이 없는 제3의 전문가(건축사)가 건축물의 안전 및 합법 여부를 객관적으로 판단하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법안만 시행됐을 뿐 관련 제도는 형편없이 부실하다. 이들의 업무가 국민 안전과 직결되는 점을 감안하면 제도를 시행함에 있어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는데도 국토교통부가 이를 방임하면서 지자체에 편법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대한건축사협회 측은 “현재 각 지자체 건축사회들이 공무원이 해야 할 현장 조사와 검사, 확인 업무를 위탁받아 수행 중인데 마땅히 지불해야 할 비용을 지불하지 않는 지자체가 수두룩하다. 관련 비용체계도 없어 200여개 지자체의 업무 대가 기준이 모두 다르다”며 “서울시는 25만~30만원을 지불하지만 대다수 지자체들은 돈이 없다는 이유로 업무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대행업무 건축사의 지정 방법과 수수료(업무 대가) 등을 각 지자체 건축조례에서 정하도록 했지만, 정작 지자체들이 법에서 정한 수수료를 조례에 반영하지 않은 탓이다. 이 때문에 업무에 따라서는 몇 백원만 지급하거나 혹은 공짜로 업무를 시키는 지자체들이 속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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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업계“정당한 대가 요구하면 행정상 불이익”
현행법 기준대로 한다면 업무를 대행하는 건축사 1인당 하루 근무시간 8시간 기준으로 33만원가량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 지자체가 예산 부족을 빌미로 업무 대행 수수료의 정당한 지급을 거부하고 있다.
심지어 현장 조사ㆍ검사 및 확인 업무 담당자의 활동비를 지역 건축사 및 감리자들이 지불한다.
본인들이 설계와 감리를 담당한 건축물에 대해 이른 시간 안에 사용승인을 받아야 하는 지역 건축사들이 품앗이를 하며 현장 조사ㆍ검사 및 확인 업무 담당자에게 지자체가 지급해야 할 돈을 대신 지급하고 있는 것이다.
건축물의 안전관리를 최일선에서 책임져야 할 국토부도 이 사실을 알고 있지만, 지자체 문제라며 방관한다. 지자체 예산문제를 건드리면 중앙정부의 입장이 곤란해지는 탓이다.
정부의 방임과 지자체의 불법 사이에서 작년 한 해 동안 약 706억원의 금액이 민간에 강압적으로 떠넘겨졌다.
전국 지자체(서울시 제외)에서 허가한 건축물 수가 2만7100여개에 달하는 점과 엔지니어링사업 대가 기준에 따른 금액을 합산하면 1년 동안 최소 약 706억원의 금액이 각 지역 건축사들의 어깨에 얹혀진 셈이다.
이 같은 관행이 15년간 누적됐던 점을 감안하면 건축사 업계가 떠안은 비용은 약 1조원으로 추정된다. 건축물 면적에 따라 조사 일수가 늘어나는 점을 감안하면 금액은 배로 늘어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처럼 지자체들이 공짜 혹은 불합리한 대가를 지급하는데도 건축사들이 위탁 업무를 계속 대행해온 이유는 무엇일까.
지역의 한 건축사사무소 대표는 “지역 건축사회는 발주처인 지자체에 거의 예속되어 있다”며 “만약 정당한 업무 대가를 요구하며 위탁업무를 거부할 경우 해당 건축사가 설계 및 감리를 수행한 건축물의 사용승인이 늦게 떨어지는 등 ‘관행적인 불이익’이 주어진다”고 토로했다.
발주처인 지자체에 예속된 지역 건축사회가 울며 겨자먹기로 저가에 업무를 수행하고, 지자체는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자신들이 해야 할 업무를 그들에게 전가하는 비정상적인 일이 벌어지는 셈이다.
조동욱 대한건축사협회 인천시회장은 “사실상 건축사들이 염전의 노예근로자들과 다를 게 없다”며 “가장 큰 문제는 지자체에 없던 사업예산을 급조하라고 지시만 하고 나 몰라라 하는 국토부의 방임주의다. 이럴 거면 중앙부처 공무원이 도대체 왜 필요하느냐”고 강하게 질타했다.
◆ 업계 '울며 겨자먹기式'업무수행, 까닭은?
"정당한 대가 요구하면 불이익 불보듯, 공무원 나와 건물 오차범위까지 조사"
지자체가 위탁업무에 대한 대가를 지급하지 않는다면 이는 엄연히 불법이다. 하지만 전국 지자체에 월급 못 받는 공무원은 없어도 대가 못 받는 준공무원은 넘쳐난다.
‘공짜업무 지시’가 문제시되자, 국토부는 2008년부터 지자체에 지역 건축사회와 별도로 협의 하에 기준을 만들고 지급하도록 했다. 그러나 지자체들은 요지부동이다. 기존에 없던 사업예산을 편성하려니 지방의회의 반대도 심하고, 무엇보다 업무의 위탁 여부와 대가지급 기준이 의무화돼 있지 않아 지자체가 굳이 따를 필요도 없다.
국토부도 이를 알지만, 지자체의 예산문제에 개입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그저 묵인한다. 이 탓에 설계자 또는 감리자가 현장의 대행업무 대가를 ‘활동비’ 명목으로 지급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는 엄연히 위법이다.
그렇다면 이들 지자체가 대가를 주지 않고도 업계에 위탁업무를 지시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업계 관계자는 “만약 정당한 대가가 지급되지 않는다는 명목으로 불만을 제기하거나 위탁 업무를 거부하면 당장 해당 건축사가 설계 및 감리를 수행하는 건축물에 담당 지자체 공무원이 현장조사를 나온다”고 답했다.
건축법과 행정법이 다름으로 인해 공무원이 마음만 먹으면 뭔가 하나 걸려들 수밖에 없는 현실을 악용하는 거다.
이들 지자체 공무원들이 애용하는 수법은 ‘허위보고’다.
예로 건축법은 벽체의 높이나 너비에 대해 1~2%가량의 오차범위를 허용한다. 반면 행정법에는 오차범위란 개념이 없다. 공무원들이 파고드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만약 A라는 건축사가 위탁업무를 거부할 경우 B공무원은 A건축사가 감리를 하는 건축 현장으로 조사업무를 나온다. 원래는 지역 건축사회에 위탁하는데 관례를 깨고 직접 수행하는 것이다.
B공무원은 A건축사가 감리한 건물을 이 잡듯이 뒤진다. 조사 과정에서 건축법상 오차범위 내의 차이가 적발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행정법은 오차범위를 인정하지 않는 탓에 이 경우 A건축사가 작성한 감리보고서는 행정법 상 ‘허위문건’에 해당한다. ‘허위문건 작성’은 과징금은 둘째치고 영업정지까지 나올 수 있는 사안이다. 업체 입장에서 영업정지는 ‘사형선고’나 다름없다.
건축 업계가 지자체의 강압적인 위탁업무 지시를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수행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는 셈이다.
업계 관계자들은 “건축법이 인정한 오차범위 내의 불일치가 발생하는 점을 공무원이 파고들면 전국 건축사 중 행정법상 처벌을 피해갈 수 있는 건축사가 없다”며 “이 같은 지자체의 횡포에 대해 국토부에 민원을 넣으면 국토부 공무원들의 답은 한결같다. ‘법대로 하라’는 거다. 그런데 이 같은 비정상적 관행이 ‘법대로’는 아니지 않느냐”며 강한 불만을 호소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