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8일 화재로 수십억원의 재산피해를 입은 대전 아모레퍼시픽 랙크식 물류창고가 소방시설이 정상 상태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장기간 방치해 온 것으로 드러났다.

28일 오후 2시 49분께 대전 대덕구 대화동 아모레퍼시픽 물류창고에서 불이 나 물류창고와 창고 내 보관하고 있던 물품들이 소실됐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이 사고로 수십억원의 이르는 재산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고 당시 현장에는 310명에 이르는 소방대원들과 경찰 185명, 의용소방대 123명 등 약 600여명의 인원이 투입됐고 펌프차 20대, 물탱크 7대, 화학차7대, 굴절 5대, 구조 2대, 구급차 2대 등 50여대의 소방차량과 4대에 이르는 헬기까지 동원됐다.

대전소방본부에 따르면 화재는 소방 5시 23분경 불길이 잡혔지만 가연성 샌드위치 패널로 지어진 건물 특성 때문에 화재진압에 애를 먹으면서 화재가 발생한지 7시간여 만인 9시를 넘겨 진화작업을 마무리했다.

사고 직후 소방방재청은 이번 화재사고의 재발방지를 위한 민관합동조사단을 꾸리고 현지조사를 마친 상태다. 조사 결과 아모레퍼시픽 물류창고의 소방시설은 애초에 정상상태가 아니었던 것으로 나타나는 등 허술한 소방시설과 관리 실태가 낱낱이 드러났다

화재가 발생한 아모레퍼시픽 물류창고는 조립식 철골조 샌드위치 패널을 사용한 약 27m 높이의 창고로 면적은 4,400제곱미터 규모에 이른다. 다단식 구조물 위에 물품을 대량 적재하는 방식의 랙크식 자동화 창고다.

▲ 이번 화재로 인해 잿더미가 되어 버린 각종 화장품들. © 최영 기자

관할 소방관서에 따르면 지난 1990년 4월경 완공된 이 창고는 화재 당시 화장품과 샴푸, 린스, 칫솔 등 다량의 포장 완제품들을 보관하고 있었으며 이번 화재로 창고건물과 화장품 등이 대량으로 소실됐다.

화재 발생 물류창고에 적용된 소방시설은 스프링클러설비와 50여 개의 소화기, 24개의 옥내 소화전, 자동화재탐지설비(광전식 연기감지기 30, 회로 19), 19개의 경보설비(비상벨, 비상방송), 58개의 유도등, 5개의 옥외소화전 등이다.

특히 스프링클러설비의 경우 27미터에 이르는 랙크식 창고 내부에 수직으로 7개 층으로 나누어 일정 높이 간격마다 헤드가 설치되어 있는 구조이며 총 1,807개의 스프링클러 헤드가 적용됐다.

자체점검의 경우 지난 3월 25일부터 28일까지 민간 전문업체를 통한 종합정밀점검을 실시해 양호 판정을 받았으며 지난해에는 한국화재보험협회로부터 안전점검을 받아 이 역시 양호하다는 판정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장기간 방치된 ‘불량 스프링클러설비’

소방방재청의 조사결과 아모레퍼시픽 자동화 창고에 구축된 스프링클러설비는 제기능을 발휘할 수 없는 상태임에도 장기간 방치해 왔던 것으로 드러났다.

▲ 아모레퍼시픽 물류창고에 설치된 스프링클러 헤드의 모습 © 최영 기자

이 자동화 창고에 적용된 스프링클러설비는 천정부에 스프링클러 헤드를 설치해야 하는 곳이지만 천정에는 스프링클러 헤드가 설치조차 되지 않은 상태였다. 또 랙크의 일정 높이마다 다단형태로 구축된 스프링클러 헤드에는 반드시 필요한 차폐판도 없었다.

차폐판(Water Shield)은 화재 시 상부에 위치한 스프링클러 헤드가 먼저 작동하면 밑 부분의 헤드가 상부에서 뿌려지는 물에 냉각돼 작동이 늦어지는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설치되는 장치로 현행법인 화재안전기준에서도 의무적으로 설치토록 강제하고 있다.

▲ 단관된 부분의 스프링클러 배관과 봉인된 배관

특히 화재 당시 최초 발화 지점으로 추정되는 랙크 부분에는 수직으로 뻗은 스프링클러 설비 배관 15개 중 13개가 잘려 나간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장기간 방치해 온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 2011년 3월 랙크설비 시공업체가 시공 과정에서 스프링클러 설비 배관을 단관 후 봉인했던 것으로 확인됐지만 건축물 소방안전관리를 맡고 있는 관리자와 자체점검을 실시한 소방시설관리업체 마저도 이 사실을 화재가 발생할 때까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전체적인 설비 측면에서도 아모레퍼시픽 물류창고의 스프링클러설비는 ‘준비작동식’을 채택하고 있어 화재 시 초기 화세제어에 불리한 조건이었다.

준비작동식 스프링클러설비는 평상시 배관(2차 측)에 물이 차있지 않고 대기압이나 저압으로 있다가 화재가 발생될 경우 화재감지기 작동에 따라 스프링클러 헤드까지 소화용수를 보내주는데 헤드 파손 등에 의한 수손피해와 동파를 방지할 수는 있지만 설비 복잡화에 따른 고장 가능성이 높고 관리가 어려우며 습식설비에 비해 작동 지연의 우려 또한 크다.

이 때문에 미국 NFPA 기준에서는 준비작동식이나 건식 스프링클러 설비를 적용할 경우에는 작동지연에 따른 화재 크기가 커지는 것을 고려해 스프링클러 방수구역면적을 1.3배 증가하도록 규정하고 있을 정도다.

화재위험성이 높은 특성임에도 일반적인 스프링클러 헤드(표준형, 표시온도 72℃)가 적용된 점과 헤드의 설치 위치도 문제점으로 꼽히고 있다.

랙크식 자동창고는 층고가 높고 가연성 적재물이 수직으로 쌓이기 때문에 화재 시 빠른 상승열기와 높은 열방출이 진행되는데 이러한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일반적인 스프링클러 헤드를 적용했기 때문이다. 또 다단으로 구성된 랙크의 폭이나 높이를 고려하지 않고 일정 높이마다 스프링클러 헤드를 설치했다는 점도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상 상태 모르는 준비작동식 “문제 심각”

이번 아모레퍼시픽 소방시설의 핵심적인 결함은 스프링클러 설비 배관이 랙크 보수 과정에서 단관됐다는 점이다. 조사단에 따르면 이 단관된 부근에서 최초 발화가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아모레퍼시픽 물류창고 소화배관의 단면도 © 소방방재신문

여기에 더욱 심각한 문제는 배관을 절단했을 당시 스프링클러 설비의 이상상태를 즉각적으로 인지했어야만 하는데 이를 알아채지 못했다는 부분이다.

관련 전문가들에 따르면 미국 등 선진국의 경우에는 준비작동식 스프링클러설비를 적용할 경우 2차측 배관에 공기압을 걸어 놓고 이 공기압의 이상유무가 생겼을 때는 바로 감시가 가능하도록 구성하고 있다. 하지만 국내에는 이 같은 규정이 미비한 실정이어서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 아모레퍼시픽 물류창고 내 구축된 스프링클러 설비의 평면도와 단관된 배관의 부분 © 소방방재신문

수계소화설비의 한 전문가는 “현행 화재안전기준에서는 대기압을 인정하고 있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며 “이로 인해 2차측에서 발생되는 이상상태를 확인하지 못하게 된다”고 꼬집었다.

이어 “이러한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준비작동식 설비의 2차측 배관에는 누설 시 경보가 가능한 감시공기압을 반드시 충전하도록 해야만 한다”며 “신뢰도가 높은 습식설비를 갖추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만일 준비작동식을 적용할 때에는 감시공기압은 물론 선진국과 같이 방수구역면적을 증가시켜 적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적응성조차 없는 화재감지기 적용

아모레퍼시픽 자동화창고의 화재감지기는 건축물 높이에 따라 관련법에서 분류하는 감지기의 적응성조차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 아모레퍼시픽 물류창고에 설치된 화재감지기(광전식 연기감지기) © 소방방재신문

창고 내 설치된 30개에 이르는 ‘광전식 연기감지기’는 현행 국가 화재안전기준에서 조차 건축물 높이 구분에 따라 허용되지 않는 감지기였다.

관련 기준에서는 20m가 넘는 장소에 화재감지기를 부착할 경우 불꽃감지기나 아날로그방식의 광전식(분리형 또는 공기흡입형)감지기를 설치토록 규정하고 있지만 이조차 지키지 않은 셈이다.

관련법에서 이 같이 부착높이별로 화재감지기의 종류를 설정하고 있는 이유는 감지기의 특성에 따라 높은 천장에 설치될 경우 열이나 연기가 감지기까지 도달해 화재를 조기에 감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감지기의 기본적 특성조차 고려되지 않은 아모레퍼시픽 자동화창고의 화재감지기는 과거 지어진 창고건축물의 안일한 소방시설 적용 실태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랙크식 창고 소방시설 기준 개선방안 마련키로

소방방재청은 이번 아모레퍼시픽 물류창고 화재 이후 이례적으로 민관 합동조사단을 구성했다. 소방시설의 핵심 규정인 국가 화재안전기준을 담당하는 소방제도과와 화재조사를 담당하는 방호조사과, 한국소방기술사회 추천 기술사 등 4명이 핵심 구성원이다.

소방방재청은 이번 조사결과를 토대로 랙크식 물류창고 스프링클러 설비 등 소방시설 기준에 대한 문제점을 분석하는 등 제도적 개선방안을 구상해 나간다는 방침이다.

이에 따라 이달 중 랙크식 물류창고 스프링클러 설치에 관련한 표본조사를 실시하고 물류저장시설 특성에 적합한 소방시설설치기준 개발연구용역 결과도 화재안전기준에 반영해 나가기로 했다.

특히 이번 사고로 랙크식 물류창고에 대한 전국 단위의 소방특별조사도 실시될 것으로 보인다. 소방방재청은 이번 사고와 관련해 랙크식 물류창고의 유사사례 방지를 위해 특별조사를 검토하고 있다.

대전소방본부는 아모레퍼시픽 물류창고의 비정상적인 소방시설과 관련해 소방시설 유지관리의무와 소방시설 자체점검 소홀에 대한 법적 조치를 취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