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2년부터 최근까지 우리나라를 뒤흔들었던 핵심이슈 중 하나는 ‘원전 비리’였다.
원자력 발전소 설비 가동에 필요한 부품 및 자재공급을 둘러싼 비리가 검찰에 의해 밝혀지면서 국민들이 충격에 휩싸였다. 특히 원전 운영기관인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에서 품질보증서를 위조한 사실이 드러났다.
원전비리는 실타래처럼 길고 복잡하게 엉켜있었다. 말단 대리부터 최고위층에 이르기까지 상당수의 한수원 임직원들이 부품·자재업체의 금품로비에 포로가 됐다.
원전 비리의 후폭풍은 질기고 거셌다. 품질 미검증 부품 교체에 따라 일부 발전소가 제대로 가동되지 못했다. 이로 인해 원활한 전력공급에 큰 차질이 빚어졌다.
정부가 대대적인 에너지 절감운동을 추진하면서 공무원들은 찜통더위에도 에어컨을 꺼야만 했다. 애꿎은 일반국민들도 정부 시책에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동참해 냉방기 가동을 최소화하고 부채질로 무더위와 싸웠다.
원전비리는 공공입찰과 계약과정에서 부정이 생겼을 때 그 여파가 얼마나 크고, 무고한 국민들에게 어떤 피해를 줄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원전비리를 반면교사(反面敎師)로, 공공입찰 및 계약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부정이나 비리를 절대로 용납해서는 안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커졌다.
□ 국민 여망도 헛되이= 공공입찰을 엄정하게 집행해 각종 부조리가 발붙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국민적 여망에도 불구하고 공공 조달시장에서의 입찰비리는 좀처럼 근절되지 않고 있다.
공공입찰 비리는 초대형 국책사업에서부터 지방자치단체가 집행하는 소규모 수의계약 등에 이르기까지 규모와 분야를 가리지 않는다.
최근에는 안정적인 공공전산시스템 운영에 중대한 차질을 빚을 수 있는 불미스러운 사건이 터졌다. 사건의 진원지는 국가정보통신망의 관제소 격인 정부통합전산센터였다.
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는 지난해 6월부터 정부통합전산센터에서 발주하는 전산용역사업 입찰비리에 대해 내사를 진행해 입찰·계약과정에서 검은 거래가 이뤄진 정황을 포착했다. 전산센터 공무원 및 조달심사위원(교수)이 용역업체와 유착된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경찰은 두 차례에 걸쳐 대전·광주전산센터 및 혐의업체를 압수수색하는 등 계좌·통신수사 및 장부분석과 관련자 출석조사를 실시했다. 이를 통해 전산용역사업 입찰과정에서 공무원과 조달심사위원, 전산업체 간 비리관계를 확인했다.
경찰청은 지난 14일 이 같은 내용의 정부통합전산센터 전산용역 입찰비리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경찰은 용역업체에 발주정보 및 내부문건 등을 유출한 광주센터 공무원 3명과 1억1000만 원의 뇌물을 수수한 대전센터 공무원 등 4명을 입건했다.
또한 업체로부터 청탁을 받고 조달심사 시 업체에 유리한 평가를 해 준 대가로 50~200만 원씩 총 1900만 원을 수수한 교수 22명은 배임수재혐의로 입건했다.
아울러 공무원과 조달심사위원에게 금품을 공여한 6개 업체 15명에 대해서는 뇌물공여 및 배임증재, 횡령 등의 혐의로 입건했다. 이 밖에 공무원 15명, 교수 3명 등 총 18명에 대해서는 각각의 비위사실을 해당기관에 통보했다.
□ 식사·골프·향응 등 망라 = 경찰수사 결과를 보면, A사 대표 문 모씨(47세)는 대전·광주·전북지역에서 4개 법인을 운영하며 대전·광주전산센터에서 발주하는 전산용역을 독점하고 있었다.
실제로 A사는 2012년 말, 2013년 사업으로 발주한 9개 사업(약 550억 원) 중 7개 사업(약 400억 원) 수주했다.
이 업체는 평소 정보통신관련학과 교수들인 조달심사위원이 참여하는 학회를 후원하거나 골프모임에 참여하는 등의 방법으로 심사위원들을 철저히 관리해 왔다.
특히 조달심사 전일에는 “○○사업 입찰에 참여했으니 낙찰되도록 평가를 잘 부탁드리고, 평가 참여 시 연락주세요”라는 청탁성 문자메시지(SMS)를 발송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더욱이 평가참여 교수들에게 경쟁업체의 약점을 메시지로 보내거나 평가당일 심사장에 태워다 주면서 경쟁업체를 공격할 수 있는 질문지를 건네기도 했다.
또한, 심사위원 참여사실을 알려주지 않은 교수들에게는 심사장 입구에서 청탁인사를 하거나 문자메세지를 보내기까지 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 업체가 지난 2010년부터 2012년까지 각종 사업을 수주하면서 50~200만원의 기프트카드를 제공하거나 학회 후원금을 지급하는 등의 수법으로 교수 25명에게 공여한 낙찰사례금 및 후원금은 총 6600여 만 원에 달한다.
이 뿐만 아니라 이 업체는 전산센터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식사·골프·향응 등을 제공하며 사업계획서 및 발주정보 등을 수시로 입수해 온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은 A사 등으로부터 사업편의·정보제공 대가로 각 200여 만 원 상당의 금품향응을 수수한 직원 2명을 뇌물수수 혐의로 입건했다.
또한 정보유출 직원 3명은 전자정부법위반, 개인정보보호법위반 등의 혐의로 입건했다. 아울러 향응금액이 적거나 부정처사가 없는 직원 15명에 대해서는 해당기관에 비위사실을 통보했다.
□ 직원급여 가장해 뇌물 받아 = 전산센터와 용역업체간 유착관계를 확인한 경찰은 수사범위를 더욱 확대했다.
이를 통해 대전센터 소속 ○○○팀장(4급 상당·55세)의 각종 비리를 적발, 지난해 11월 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위반(뇌물수수) 혐의로 구속했다.
경찰에 따르면 ○○○팀장은 지난 2010년 7월 과거 전산업체 근무 시 상사였던 B컨설팅 대표에게 발주목록·정책정보 등 내부정보를 제공해준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2010년 3월부터 2013년 10월까지 조카명의의 차명계좌로 업체 직원급여를 가장해 1억700만원의 뇌물을 수수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뿐만 아니라 그는 2012년 9월엔 사업편의 제공 대가로 대전센터 용역을 수행하는 C업체로부터 300만원의 기프트카드를 수수한 혐의도 받고 있다.
경찰은 광주센터에서 국세시스템 업무를 담당하는 공무원 ○○○(6급)의 비위사실로 밝혀냈다. 그는 D업체 대표로부터 청탁을 받고 낙찰업체에 D업체와 하청계약을 맺도록 종용하거나, 컨소시엄에 참여시키도록 압력을 행사해 준 대가 등으로 2011년 2월부터 2012년 8월까지 1000만 원의 뇌물을 수수한 혐의를 받고 있다.
□ 유착비리, 위험수위 넘어 = 경찰은 이번 입찰비리 수사를 통해 전산업체가 조달평가위원 등에게 장기간 금품 및 향응을 제공하거나 심사청탁·발주정보 유출 등의 부정한 방법으로 사업을 수주해 온 비리사슬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업계에서 조차 공공정보화 사업 수주과정에 만연한 유착비리가 심각하다는 자성이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연구개발은 도외시하고 불법로비에 치중하고 있다는 업계의 부조리가 위험수위를 넘어섰다는 지적이다.
이에, 이번 수사를 계기로 조달심사 운영시스템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고 산학협력 기능을 악용하는 사례에 대한 근본적 예방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공공기관에서는 조달심사의 전문성과 공정성을 도모하기 위해 심사위원 대부분을 관련학과 교수들로 구성하고 있다. 하지만 관련업체에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이들을 지능적으로 관리하며 ‘아군’으로 만들었다.
이번에 적발된 업체들은 인력풀에 포함된 교수들의 학회활동을 지원하거나 실습·취업기회를 제공하는 등 산학협력을 빌미로 두터운 친분을 쌓았다. 특히 업체들은 이 같은 친분을 디딤돌 삼아 금품제공 및 골프·식사 대접 등을 통해 스폰서십을 형성하며 사업수주에 대한 청탁을 철저히 준비했다.
특히 조달청에서 교수들에게 심사참여 의사를 확인하는 SMS를 보내 심사위원회를 구성한다는 점을 악용, 조달평가에 참여하는 교수들을 미리 파악해 집중적인 로비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와 관련, 심사위원회 구성·운영에 있어 전반적인 제도개선이 요구되고 있다.
□ 공무원 취업 등 규제 필요 = 공무원 특채 및 퇴직공무원의 취업을 제한하는 등 규제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현재 정부에서는 업무전문성 등을 이유로 전산업체 직원을 정부통합전산센터 공무원으로 특채하는 경우가 많다. 이와 더불어 공무원들이 퇴직 후 전산업체로 취업하는 것도 흔히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 같은 취업시스템은 구조적으로 비리에 노출되기 쉬운 허점을 지니고 있다. 특채 공무원은 업체 직원들에게 출입편의를 제공하거나 내부정보를 전달하고, 퇴직 공무원은 기존 인맥을 활용해 전산센터 내부정보를 입수하는 등의 부정이 발생할 소지가 크다.
이 과정에서 용역업체와 공무원간 유착고리가 형성될 수 있어, 관련비리를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제도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 조달청, 사후약방문? = 수사결과가 발표되자 정부조달을 총괄하는 조달청에는 비상이 걸렸다. 조달청은 이번 경찰 수사와 관련, 제안서 평가위원에 대한 로비 등 공공정보화 사업 입찰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비리를 근절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하기로 했다.
특히 입찰과정에서 업체와 제안서 평가위원 간 유착 등 비리예방을 위해 추가적인 제도개선을 추진할 방침이다.
이는 조달청은 공공정보화 사업의 입찰비리 방지를 위해 지속적으로 제도를 개선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제안서 평가위원에 대한 로비 등이 근절되지 않고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사후 약방문’ 격이지만 조달청으로서는 특단의 대책을 마련해 취약한 공공 조달시스템에 대한 대내외의 십자포화를 막아내야 하는 절박한 처지에 놓였다.
조달청이 그 동안 공공정보화 사업의 비리를 차단하는데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조달청은 나름대로 관련사업 발주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높이기 위한 안전장치를 강구해 왔다.
일례로 업체가 제안서 평가위원을 사전에 파악할 수 없도록 시스템을 통해 제안서 평가위원을 무작위로 선정하도록 했다. 또한 업체와의 유착 의혹이 있는 평가위원은 즉시 평가위원 풀에서 제외했다.
특히 지난해부터는 일부 평가위원이 전체 평가를 좌우할 수 없도록 평가위원들 간 토론을 도입하고, 평가위원을 사전에 접촉한 업체의 경우 해당사업을 수주할 수 없도록 감점 등 불이익을 줘왔다.
그러나 공공정보화 사업 발주가 계속되면서 일부 평가위원이 업계에 노출되면서 안전장치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또한 평가위원의 87%가 대학교수로, 평가위원 구성의 다양성이 떨어지는 등 전반적인 제도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 평가체제 전면 손질 = 이에 따라 조달청은 올 상반기 전문평가위원단 제도를 도입하는 등 공공정보화 사업의 평가체제를 전면적으로 재구축하기로 했다.
먼저 전문성을 갖춘 위원들로 평가위원단을 50명 수준으로 소수정예화하고 평가위원 명단, 평가과정, 평가결과를 공개할 계획이다.
또한 대학교수 외에 공공·민간분야의 정보화전문가 등으로 평가위원을 구성할 수 있도록 하되, 반드시 소속기관장으로부터 추천을 받도록 평가위원 신청자격을 강화할 방침이다.
이와 함께 발주기관 제안요청서와 업체별 제안내용을 쉽게 비교·평가할 수 있도록 ‘e-발주지원 통합관리 시스템’을 구축, 평가위원들의 평가를 지원하기로 했다.
금년 중 구축될 ‘e-발주지원 통합관리 시스템’은 제안요청서 및 제안서 작성 및 제출, 평가 등 정보화사업 발주 전단계를 온라인으로 처리하는 기능을 한다.
백승보 조달청 구매사업국장은 “기업들이 아직도 자체 경쟁력을 배양하기보다 평가위원 대상 로비 등에 의존하는 현실이 안타깝다”면서 “이번에 경찰이 발표한 기업들에 대해서는 뇌물공여 사실이 확정될 경우 입찰참가자격 제한 등 강력한 제재를 가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기업들의 윤리의식 제고에만 기대할 수는 없는 만큼 공공정보화 사업 평가의 투명성, 공정성, 신뢰성을 높이기 위한 제도개선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갈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 공공기관 출신, 취업 제한 = 공공정보화 사업의 비리를 막기 위한 조달청의 대책과 함께 범정부 차원의 공공기관 입찰비리 근절방안에도 시선이 쏠린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2월 25일 ‘공공기관 입찰비리 근절’ 등의 내용을 담은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정부 분석에 따르면 공공기관 퇴직자가 재직 중의 인맥을 바탕으로 해당기관의 업무 담당자에게 영향력을 발휘해 계약의 공정성을 해칠 우려가 상존하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공공기관 입찰비리 발생 시 뇌물제공자와 업체는 모두 제재를 받는 반면, 공공기관은 개인만 처벌을 받고 있어 비리 근절의 효과가 미흡하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실제로 뇌물제공·수수자의 경우 5년 이하 징역, 뇌물제공업체는 2년 이하 입찰참가제한 등 강한 제재를 받지만, 공공기관에 대해서는 개인에 대한 처벌 외에는 별도의 재재 규정이 없다.
이에 정부는 공공기관 퇴직 임직원이 협력업체 임원으로 취직 시 해당업체와 2년간 수의계약을 금지하기로 했다. 협력업체와의 유착관계를 근절하기 위한 포석이다.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공정한 경쟁이나 계약의 적정한 이행을 해칠 것이 명백하다고 판단되는 법인 등에 대해서는 2년의 범위 내에서 입찰참가 자격을 제한하는 것이 가능하다.
아울러 입찰비리 발생기관의 해당업무를 2년간 조달청 등 전문기관에 의무적으로 위탁하는 ‘입찰비리 원스트라이크 아웃제’ 도입할 방침이다.
이를 통해 한시적으로 계약업무 권한을 박탈하는 패널티를 부과하는 동시에 입찰비리가 재발할 수 있는 여지를 제거하기로 했다.
이 밖에도 공공기관 내부에 감사·조달전문가 등 외부인사가 참여하는 ‘구매제도 개선위원회’를 구성해 자발적인 제도개선을 추진키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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