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거래소(이사장 남호기) 만큼 부침이 심했던 기관도 드물다.
전력거래소는 안정적인 전력계통과 공정·투명한 전력시장 운영을 위해 2001년 4월 설립됐다. 거래소는 산업자원부(현 지식경제부) 전기위원회와 함께 전력산업구조개편의 상징이자 추진동력이었다.
그러나 국내 전력산업계는 시장개방과 경쟁에 대한 불안감을 떨쳐내지 못했다. 거래소로선 구조개편의 필요성과 확신을 국민들에게 심어줘야 했다.
2001년 12월 27일, 거래소가 처음 선포한 비전(‘국민에게 믿음 주는 한국전력거래소’)에는 이런 절실함이 녹아있었다.
그로부터 두 달 뒤, 발전산업노조는 발전소 매각반대 등을 요구하며 38일간 장기파업을 벌였다. 남동발전의 증시상장과 매각도 시장여건 악화로 물 건너갔다.
급기야 2004년 5월 정부는 노·사·정 합의로 배전분할 중단을 선언했다. 구조개편 작업에 급제동이 걸린 것이다.
거래소로선 나침반을 잃어버린 꼴이었다. 흐트러진 내부분위기를 추슬러야 했다. 거래소의 위상과 역할, 지향점을 다시금 정립해야만 했다. 2005년 10월 5일, 거래소가 내놓은 ‘전력산업을 선도하는 세계수준의 전문기관’이란 새 비전은 이와 무관치 않다.
이런 가운데 스마트그리드(Smart Grid)라는 신조어가 전 세계에 급속히 퍼지기 시작했다. 전력산업의 미래상이 스마트그리드에 함축돼있음을 거래소는 놓치지 않았다.
2009년 7월 7일, 거래소가 선포한 브랜드 슬로건(‘Smart KPX, 전기의 미래를 열어가는 전력거래소’)은 이런 배경에서 탄생했다.
“정체상태에 놓인 구조개편 문제를 어떤 식으로든 처리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던 시기였다.
‘한전 재통합론’이 바야흐로 득세했다. 거래소의 거취문제가 세인들의 입방아에 또 올랐다. “이러다가 거래소가 공중분해 되는 것 아니냐”는 공포감이 내부에 팽배했다.
2010년 8월, 마침내 정부는 ‘구조개편 계속 추진’에 방점을 찍는 후속대책을 내놨다. 벼랑 끝에 몰렸던 거래소가 기사회생하는 순간이었다.
거래소는 이 기세를 몰아 2011년 4월 ‘창립 10주년 기념식’에서 ‘2020 뉴 비전(최상의 서비스로 미래 에너지사회를 선도)’을 발표했다. 석유, 가스, 석탄, 신재생 등 모든 에너지는 결국 전기로 수렴하며, 그 중심에 거래소가 당당히 서겠다는 포부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해 9월 15일 순환정전이란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현 정권에 대한 민심의 향방을 가늠할 수 있는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한 달 앞두고 터진 ‘대참사’였다.
여론은 극도로 악화됐다.
거래소는 블랙아웃을 순환정전이란 형태로 슬기롭게 막아냈음에도 이같은 노력을 인정받지 못했다. 거래소는 전력산업계의 천덕꾸러기이자, 지탄의 대상으로 전락해버렸다.
이사장이 물갈이됐다. 징계를 받은 사람도 수두룩했다.
직원들의 사기는 땅으로 떨어졌다. 전력사정은 그야말로 사상 최악이었다.
거래소의 계통운영기능을 한전으로 넘기는 방안이 국회 차원에서 심도 있게 논의됐다.
남호기 전 남부발전 사장이 거래소 이사장에 부임한 건 바로 그 무렵이다.
남 이사장은 조직재정비와 함께 정전예방을 위한 특별 종합대책을 잇달아 내놓는 등 해결사 본능을 발휘하고 나섰다.
고난의 행군이었다. 회사에 다녀오겠다는 말보다, 집에 다녀오겠다는 말이 거래소 임직원에겐 더 어울릴 정도였다. 이렇게 겨울과 여름, 두 번의 수급위기를 가까스로 넘길 수 있었다.
거래소는 14일 ‘신뢰받는 전력 비즈니스 플랫폼’이란 비전을 다시 만들었다.
새 비전에는 ▲광역정전 방지로 국민과 고객의 신뢰를 쌓고 ▲전력설비용량 1억kW 시대에 대비한 전력산업의 선도자로서 구실하며 ▲열린 플랫폼으로 시장을 이끄는 등 공정성 제고에 만전을 기하고 ▲G10 수준으로 도약하기 위한 경영혁신으로 글로벌 시대를 맞이한다는 핵심가치와 전략목표가 담겨있다.
남호기 이사장은 “전환기 전력산업을 안정적으로 운영함과 동시에 에너지산업의 새로운 성장동력을 이끄는 초석이 되자는 의미를 담았다”며 “전력난을 극복하기 위한 거래소의 다짐도 반영했다”고 말했다.
새 비전을 발표한 14일은 남 이사장이 부임한지 정확히 1년이 되는 날이기도 했다.
남 이사장은 이날 직원 150여명과 함께 거래소 인근 삼성1동 문화센터에서 새 비전 선포식을 조촐하게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