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전이 최근 154kV급 초고압케이블 구매 규격을 개정한 가운데, 전선 대기업들은 국제 입찰을 위한 사전정지 작업이라며 반발하고 있어 이목을 끌고 있다.
21일 업계에 따르면, 한전은 154kV 가교폴리에틸렌(XLPE)절연 전력케이블 및 접속함에 대한 규격을 개정한 상태다. 기존에 IEC와 IEEE, JEC, KS 등 여러 규격을 혼용해 오던 것을 5년 만에 IEC와 IEEE 등 범용 국제 규격으로 통일한 것이 주요 내용이다.
한전 관계자는 “그동안 다수 규격을 채용해 왔으나 전력계통 여건에 맞춰 IEC로 통일시켰다”며 “10년간의 고장사례를 분석하고 계통보호와 관련된 기술의 추이나 수준 등을 감안해 국제 흐름에 맞게 바꾼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전은 특히 이번 개정과 관련, “국제입찰을 염두에 둔 조치가 아니다”며 확대해석을 경계하고 있다.
반면 국내 초고압케이블 제조기업들은 “시장 개방을 위해 매우 까다롭던 준용기준을 단순화시켰다”며 다분히 국제입찰을 감안한 시나리오로 해석하고 있다.
더구나 한전이 27일에 해외 전선 기업을 대상으로 국제입찰 관련 설명회를 여는 것도 이 같은 추측을 뒷받침한다는 설명이다.
외국계 전선기업의 한 임원은 “한전이 154kV급 초고압케이블에 대해 국제입찰을 추진하기 위해 설명회를 여는 것으로 안다”면서 “닫혀있던 한전시장의 ‘빗장’이 열리는 것은 의미가 적지 않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로 인해 LS전선과 대한전선, 일진전기 등 초고압 케이블 3사는 한전의 국제 입찰 추진을 기정사실화하면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한전의 조치가 보호무역을 강화하는 국제 흐름에 맞지 않고, 규격 완화 성격이 짙어 자칫 품질을 저하시킬 수 있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다.
A 대기업의 한 관계자는 “직접 제조할 능력이 없는 국가를 제외하고는 로컬 기업에 대한 보호 장벽이 강화되는 게 초고압케이블 시장의 트렌드”라면서 “국제입찰은 자국 시장에 대한 방어력을 높이는 세계적 추세에 정면으로 역행한다”고 지적했다.
B 대기업의 관계자도 “스펙을 완화했기 때문에 품질에 문제가 생길 수 있고 부품수급이나 고장 대응 등 사후관리에도 허점이 있을 수 있다”며 “한전의 정확한 의도를 잘 모르겠다”고 우려했다.
그러나 한전의 또 다른 관계자는 “현재로선 154kV 초고압케이블의 규격이 바뀌고 국내외 주요기업에 이를 공지한 것 외에는 진행된 것이 없다”며 “개정된 규격에 맞춰 업체들이 등록절차를 마무리하는 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한전은 ‘국제입찰’에 대해 언급을 자제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국제 입찰을 진행하는 데 별 무리가 없는 상태다.
케이블은 그동안 변압기나 GIS와 마찬가지로 WTO(세계무역기구) GPA(정부조달협정) 비양허 품목에 포함돼 해외기업의 공공시장 진입이 불가능했으나 한전은 관련 정부 부처로부터 GPA 개정 없이도 국제입찰이 가능하다는 답변을 얻은 상태다.
이미 국제 입찰을 통해 초고압 기자재를 구매하겠다는 의지를 공개적으로 밝힌 적도 있다.
지난 6월 김중겸 한전 사장은 협력기업과의 간담회에서 “일부 독과점 품목의 경우 유찰이 거듭되면서 가격이 계속 오르는 등 조달비용이 늘고 있다”며 “우수품질의 기자재를 합리적 가격으로 구매하고 국내기업의 국제경쟁력을 높이는 차원에서 국제입찰이 필요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한전 초고압케이블 시장은 연간 최대 4000억원대로 추정되며, 이중 154kV급은 70~75%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