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전이 고강도의 자구책을 내놨다. 그러나 한전의 투자 확대를 원했던 협력업체들로서는 할 말을 잃었다. 무엇보다 원자재가 급등으로 생산 활동에 애로를 겪고 있는 제조업계는 직격탄을 맞을 것으로 보여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한전은 엔지니어링 혁신을 통해 1500억원을, 구매·조달 혁신을 통해 1700억원을 각각 절감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제조업과 관련 있는 구매·조달 분야의 경우 한전이 내놓은 절감 방법은 경쟁계약 확대, 가격조사시스템 개선, 선진조달제도 도입 등이다. 이는 기존 구매금액보다 절대적으로 싸게 구매하겠다는 것이다.

매년 적자에 시달리고 있는 한전의 경우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데 대해 이견은 없어 보인다. 그러나 한전만 바라봐 왔던 제조업계 입장에서는 당연히 이번 조치에 한숨만 나온다.

사실 최근 몇 년간 한전은 적자로 인해 지속적으로 구매 부문에서 비용 절감을 시행해 왔다. 그동안 한전에 납품을 진행해 온 제조업체들은 그 절감분을 고스란히 떠안아 왔다.

이처럼 경영 악화가 지속돼 온 상황인데, 이번 한전의 조치로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가 깊다.

이에 대해 A업체 사장은 “원가 상승 요인이 반영 되지 않아 납품가격이 하락해 왔고, 거기에 한전의 구매수량 감소가 업체들의 과당 경쟁 입찰 참여로 이어져 그 폭이 더 커진 상황인데, 여기서 한전이 비용을 더 줄이겠다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사업을 접으라는 얘기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특히 이 사장은 “한전의 경우 제품 품질을 강화하는 차원에서 스펙을 상향하고 있는 추세인데, 원가 상승분은 납품가격에 반영되지 않고 있는 최악의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B업체 관계자 역시 “물론 한전이 적자를 보는 상황에서 고통분담 차원에서 협력업체만 잘 살게 해 달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면서도 “원가에 못 미치는 전기요금 등으로 인해 발생한 적자폭을 왜 협력업체들이 떠안아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번 한전의 조치에 대해 현실적인 개선방안을 제시하는 입장도 있다.

우선 C업체 관계자는 한전의 기초금액 산정 자체가 문제가 있다며 이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 관계자는 “10억원에 계약한 후 물가변동에 따라 에스컬레이션(Escalation)이 적용돼 1억원이 상향된 경우, 차후 계약의 기초금액은 11억원을 기준으로 해야 하는데 한전의 경우 당초 계약금액인 10억원을 기초로, 그것도 일정부분 절감된 수준으로 제시하고 있다”며 “당연히 에스컬레이션이 적용된 차후 금액으로 기초금액을 산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관련업계의 자중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있다.

D업체 관계자는 “한전이 터무니없는 가격을 제시할 경우 업체 스스로 입찰에 참여하지 않으면 되는데, 우리 업계가 언제 한번이라고 그런 적 있느냐”며 “누군가 그 가격에, 아니 더 낮은 가격에 매번 입찰에 들어가는데, 어떻게 한전 탓만 할 수 있겠느냐”고 토로했다. 즉 원가조사 문제를 넘어 업계 내부적 문제로 스스로 자성해야 한다는 지적인 셈이다.

여기에 E업체 관계자는 “그동안 전력분야 중소기업들이 너무 한전만 바라보고, 해외 진출 등 판로 확대에 신경을 쓰지 않은 것 역시 사실”이라며 “지금부터라도 새로운 판로를 찾는데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이번 한전의 자구책으로 업계의 시름이 늘어나고 있지만 뾰족한 해법은 나오고 있지 않는 가운데, 내달 12일 진행될 한전과 협력기업 CEO간 간담회가 그 해법 제시에 결정적 계기가 될지 관심이 모아지게 됐다.